기척도 없이 목소리

 

기척도 없이 목소리가
떨어져 들어왔다

똑 똑 똑

몇 날  며칠
몇 달  몇 년
십년  그리고  이십년

가라앉은 회반죽으로
한 방울이 떨어져 들어왔다

나이 오십
단단히 가라앉힌 남자 가슴이

회반죽보다 굳어진 마음이
풀어지고 있다

기척도 없던 목소리 한방울 ..
깊게 굳혔던 가슴속 덩어리가 그렇다

시커먼 순간들

세시 이십분만큼 돌아보던 눈동자는
나를 보았고  나도 서슬을 보았다.

 키를 넘는 어깨의 오감들이
헤쳐나올 수 없는 그림자로 변하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그 시커먼 순간  ..

 여섯  짧은 다리는 허둥대기만 했고
세시 이십분만큼 돌아보던 눈동자와 동행들은 사라졌다

그 시간들을 기억한다
시커먼 순간들의 조각  ..

그게 얼마만큼이었을까?
천진하고 순진한 웃음이 들렸고
그제서야 나는 동행의 등뒤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세시 사십분만큼 돌아본 눈동자는 여전히 싸늘했고
화가 난 듯 하기까지 했다

 

아마 그 서늘했던 게
죄다   나 때문만은 아니었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됐다
그 시간을 기억하기 싫어서
시커먼 순간들  ..

 

그 이후로의 나는  ..

 

 

[응답하리 1988] 빚 청산한 날(친구의 사죄)

드라마였지만 실제로 딱 한번만이라도 겪어보고 싶었던 순간.
가까운 친척이 이십여년만에 처음 뗀 말 ‘갚아줄 수 있느냐’라는 그 말에 이리 대답했다

‘다른 데서도 떼이면서 왜 나한테만 달라 하느냐?’
공직에 있는 큰 아들과,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계법인 이사인 둘째 아들을 둔 친척.

그뿐인가?  정말 어렵다고 부탁을 해서 ‘오죽하면 나한테까지 전화를 할까’ 해서 통장에 있는 돈 탈탈 털어서 송금해줬다.  두번이나.

‘갚아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문자 폭탄이 오더군. 하하하하 남자 나이 오십이 넘은 사람 입에서 그것도 제법 점잖은 자리에서 한때는 행세 좀 하던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 모이사님. 댁에게 빌려 준 돈 받지 않는다고 죽는 것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꼭 받을테니 기억하고 계시오. 

뿐인가. 망하는 사업에 관심있던 ‘이미 망했던 친구’에게 몰아줬다. 사무실도 쓰게 해줬고, 집기도 쓰게해줬고 심지어 거래처까지

초짜들이 언감생심인 거래처까지 직접 소개시켜줬다. 한데 세상이 참 좁더라. 소개해준 거래처에서 내 욕을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그 거래처 담당자가 자기 친구에게 ‘이런 일이 있더라’며 술자리에서 내 친구 녀석 얘기를 했었던가 보다. 

‘소개시켜준 사람 욕을 그렇게 심하게 하는 거 처음봤다’면서. 한데 세상이 참 좁기도 하지. 그 술자리 뒷담화를 듣던 사람이 내 친동생 회사 동료일 줄을 누가 알았을까? ‘내 친구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했다가 친동생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욕을 들었다.
‘니 친구가 너를 뭐라고 하고 다니는 줄 알기는 하냐?’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내 인생을 통채로 바꿔버린 그 선한 눈빛의 사기꾼. 

우여곡절끝에 의정부 교도소에서 만났다. 만감이 교차하더군. 내 돈 갚겠다고 했다가 연락이 두절됐어도 ‘어디가서 굶지는 않는지, 빚쟁이들에게 얻어맞고 다니지는 않는지’  그 걱정했었는데 없는 상황에도 가끔씩 면회가서 용기 잃지 마시라고 했다. 고맙다더군. 

한데 3월에 출소한다 알려줘서 때마침 바쁘기도 해서 2월에 다시 면회를 갔더랬다
하하하하  교도소 직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더군 ‘1월에 출소했다’
그것마저도 거짓말이었더군

파리서 사업하는 최모 실장님. 당신이 내게 갚을 돈, 받아달라는 물품 대금 관련 서류 아직도 고스란히 갖고 있소. 당신 덕분에 인생이 바꼈지만 그래도 당신 원망은 않으려고 참으로 애쓰며 살았소.

당신 어디있는지 모르는 바 아니고, 당신에게 받을 돈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 아니오. 당신 덕분에 다니던 교회도 발길 끊었소. 이웃이 죄를 지으면 일곱번씩 일흔번도 용서를 해주라 하던데. 당신은 이십년동안 단 한번도 내게 용서를 구하지 않더이다. 

당신이 믿는 주님과 내가 알고 있는 그분이 같은 분일텐데
당신은 주말마다 평온을 얻고, 구원을 받는 모양이던데
당신에게 용서를 베풀어야 할 나는 왜 아직도 이리 괴로울까?

당신 주님께 물어봐주시겠소?
세 따님의 아버님?

창자가 끊어질 것처럼 아픈 약이 있었다.

속으로 쌓이고 쌓인 것이 급기야 ‘나’를 썪게 할 정도가 된 사람들에게나 처방해준다는 약. ‘먹고 잘못돼도 모른다’며 피식 웃으며 주던 약.

다들 창자가 끊어져 죽을 것 같이 아파서 바닥을 굴러댔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산 사람의 맥이 아니’라며 혀를 차던 사람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플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