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넥타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무척이나 깁니다. 가급적이면 읽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냥, 쓰고 싶었고 … 언젠가는 써야할 것 같았습니다.
써놓고도 읽지 마시라고 얘기하는 지금의 심사를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겐 너무나 복잡다단하고, 무척이나 축약되어져 남아있을 뿐인 몇조각의 기억들입니다.

나는 지금도 ‘엄마’라고 부릅니다. 혹,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마마보이?’라는 억측을 받기도 합니다만 엄마는 그냥 웃습니다. 나도 피시식~하고 말 뿐입니다. 아마 마마보이였다면 이렇게 사고뭉치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무언의 동의가 엄마와 내겐 있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저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 날이 갈수록 … 어렵습니다. 적합한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분명, 내게 있어서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척이나 복잡 다단합니다. 아마 ‘절대적인 복종감’이 흐트러지면서 이렇게 혼란스러워 졌다고 기억이 됩니다. 지금도 휴일이나 일요일을 싫어하는 것은 ‘하루종일 아버지와 함께 있어야 하는 날’이었던 까닭입니다. 그만큼 절대적인 분이셨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친목계의 가족동반 모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모시려고 삼거리 건널목에 서 있을 때였습니다. 맞은 편에 도착하신 아버지가 반갑게 손을 내게 흔드셨습니다. ‘믿었던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아마 팔할쯤은 정확할 것같습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헌데, 아버지는 주윗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그저 ‘키작은 남자’였을 뿐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친구가 많은 유형의 사람은 아닙니다. 게다가 사교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나나 가족의 기억으로도 ‘유일한’ 친구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날, 아버지가 안방 문도 닫지 않으시고 울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기억에도 그 친구라는 개새끼가 몹시도 모질게 굴었다는 생각이 남아있습니다.

내 아버지는 가느다란 목과 좁은 어깨를 가진 남자이고 밀가루처럼 창백한 피부를 가진, 아주 얇은 팔목을 가진 사람입니다. 도무지 ‘시골 사람 같지 않다’고 엄마는 가끔 핀잔을 주곤 합니다. 전형적인 선비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또, ‘책좀 읽으라’고 내게 핀잔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딸각발이처럼 사셨다라면 오히려 내 마음이 지금쯤 편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흰머리 하나 없으실 것 같던 양반이 내게 넥타이를 내미셨습니다. ‘무척이나 잘 꾸미시려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게도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마 나도 아들이 생긴다면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줄겁니다. 그건 아버지로써 누군가에게 양보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이 들지 약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내게 두번 감아 매는 매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윈저 노트’라고 그걸 부르는지 어쩐지는 알 바 아닙니다. ‘이렇게 매야 단정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커다란 와이셔츠도 물론 입히셨었습니다.

‘단추는 끝까지 잠궈야 한다’
‘이걸 이리로 넣어서 이렇게 돌린 다음에 이렇게 하면 매듭이 예쁘다’라고 조곤조곤 얘기해주신다고 해서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 하면 된다. 봤지? 매봐’

… 그게 제대로 될리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못하냐’며 말을 퉁명스럽게 뱉는 것이나, 무척이나 썰렁한 농담으로 자리를 싸하게 만드는 것도 ‘애비나 자식이나’라는 엄마의 말처럼 우리가 부자지간임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가끔 사람들이 내게 그런 말을 하곤 합니다.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 다신 안만나겠다는 사람처럼 보여. 등이 냉정해’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 느낌을 주는 지 …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무척이나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상처도 그래서 쉽게 받으시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법도 없습니다. 그 또래의 분들이 그러하듯, ‘남자’로 교육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 아버지도 나처럼 누군가와 헤어질 때, 손을 몇번 흔들어야 할지를 고민할 겁니다. 그런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몹시도 싫었고, 때로는 그 훨씬 이상으로 싫기도 했습니다. 친구에게 한마디 화도 내지 않으시고 그저 울고만 계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세련된 조크를 던지실 줄 아는 분이셨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습니다. 키도 크고 풍채도 당당한 분이셨으면 했습니다.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으시는게 미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 주셨지만 정작 당신을 위해선 돈 한푼 쓰지 않으시는게 너무나 미웠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미웠습니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습니다. 새벽부터 출근해 할 일을 마쳐놓고 그저 잠시 앉아있을 뿐인 아버지를 무슨 죽을 죄라도 지은 죄인 다루듯 위세를 떨던 소위 ‘직장 상사로써의 권위 ‘라는 것도 혐오했습니다. 그저 멋적은 듯, 빙긋이 웃으시면서 ‘사회생활이 이런거야’라 말하는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비굴해 보였습니다. 싫은 것을 싫다 말하지 못하고 살아야하는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문득 알게된 오웬이나 생시몽의 글 몇줄에 단숨에 빠져들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거기 사장은 병신같드라. 아무 것도 몰라’라는 소리를 듣고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 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모른다고 하면, 그렇게 하면 그 잘난 ‘먹고 살아야하는 사회생활’이 조금이라도 덜 지랄같을 수 있다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통념적으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버리면’ 모든 것이 좋고 화목해지고 행복해 질수 있다 믿었는 지도 모릅니다. ‘사장으로써 누릴 수 있는 바,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적어도 우리 직원들은 행복해 질 수 있다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 왜 넥타이를 매듭 하나짜리로 매는지 그리고 와이셔츠 마지막 단추를 잠그지 않는지, 아버지는 모릅니다. 남들처럼 가슴과 어깨근육을 키우지 않고 등근육을 기르는지, 아버지는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 아버지와는 다르게 100 – 41사이즈 의 체형을 갖게 됐는지 그 까닭을 아버지는 모릅니다.

그저 속절없이 울고만 있었던 아버지의 좁고 얇은 등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개새끼만도 못한 친구에게도 화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아버지, 그저 ‘먹고 살아야 하는’ 까닭으로 속없이 굽신거려야 했던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고객들의 화장품을 배송하기 위해서,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서 아파트를 팔고 주식을 팔고 자동차를 팔고 사채까지 얻어야 했던 까닭입니다.

아버지는 모릅니다.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사회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회사, 만들고 싶은 사회가 어떤 것인지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아마, 알고계실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허황되다 고개를 저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불꺼진 방에 들어와, 누워있는 내 뺨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잠들어 있는 줄 아셨나 봅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내 뺨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돌아서시는 아버지는 한숨을 쉬고 계십니다. 내가 불쌍한가 봅니다. 하지만 그날도 나는 그저 눈을 감고 시간을 버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잠들어 있지 않다는 걸 아버지도 아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싫다고 그렇게 악다구니를 쳤는데 … 아버지가 내 뺨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넥타이를 내미십니다. 무척이나 盛裝을 하시고 싶은 자리인가 봅니다.
‘엄마’라는 말이 부러우셨는지 …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십니다.

‘나도 아빠라고 불러주면 안될까?’라고 말입니다.

아버지가 옳았습니다. 넓은 카라의 와이셔츠에는 두개짜리 매듭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리고 와이셔츠는 마지막 단추까지 잠그는 것이 단정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내일도 아버지께 나는 냉랭하게 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

그저 아버지의 절반만큼만이라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아빠’라고 부르지는 않을 겁니다. 힘이 드셔도 내게 우뚝 서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좋습니다.

아버지 넥타이

‘아버지’라는 이름의 내 동생

 

외출나간 엄마가 안 온다고
뉘엿뉘엿 해지는 대문밖에 쭈그리고 앉아서 훌쩍 거리던 눈큰 꼬마가

올해만 열번째 간다는 출장길을 나섰습니다.
터덜터덜 캐리어를 끌고 가는 뒷모습이 낯이 익다 싶었는데

기억속 언젠가의 아버지 출근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동생도 그걸 보던 내 나이의 아들이 있습니다.

문득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동생이 대견스럽고 안쓰럽습니다

 사랑한다  내 동생아